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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어떻게 식민지에 저항했는가 — 일제강점기 소설의 얼굴들

happy-sweetpota 2025. 6. 30. 07:14

소설이란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며, 인간 내면을 비추는 등불입니다. 일제강점기(1910~1945)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가장 치열하고 절실한 목소리가 분출된 시기였습니다. 그 시기의 소설은 단지 문학적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저항과 적응, 이상과 절망, 민중과 지식인의 삶을 동시에 기록한 중요한 문화적 텍스트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강점기 소설의 주요 특징과 경향을 통해, 당대 문학이 지닌 역사적·문학적 의미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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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과 문학의 응답

일제강점기 소설은 본질적으로 식민지라는 억압적 구조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가들은 검열, 통제, 언론의 자유 박탈, 언어와 문화의 침탈이라는 환경 속에서 글을 써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설은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 한편, 억압 속의 현실을 묘사하고 해석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문학이 더는 개인적 사유의 결과물에 머무를 수 없었던 까닭입니다. 3·1운동 이후, 소설은 더욱 본격적인 현실 비판과 사회 참여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작가들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하나는 민족주의적 리얼리즘에 기반한 저항적 소설, 또 하나는 사회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계급 문학입니다.

 

민족 정체성과 전통의 옹호 — 전통적 리얼리즘

이광수의 『무정』(1917)은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로 평가받으며, 민족 계몽과 계몽주의적 인식에 기반한 리얼리즘의 서막을 엽니다. 이 작품은 당시 신교육, 민족 발전, 근대화라는 담론을 서사화함으로써 ‘근대적 주체’를 호명하려는 의도를 지닙니다. 하지만 점차 이런 계몽주의적 소설은 현실의 억압 구조를 극복하는 데 한계를 드러냅니다. 이후 등장한 염상섭의 『삼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김동인의 『감자』,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김유정의 『동백꽃』, 김동리의 『무녀도』, 채만식의 『탁류』 등은 일상과 인간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그 안에 식민지의 부조리한 구조와 모순을 녹여냅니다. 특히 염상섭은 도회적 인물들의 부패와 세대 간 갈등을 통해 민족의 위기를 형상화하였고, 현진건은 비극적인 현실을 극도의 절제된 문체로 재현하여 문학적 완성도를 끌어올렸습니다. 김동인은 사회적 환경에 따른 인간 심리의 변화를 예리하게 포착하며, 식민지 조선의 인간 군상을 개성적으로 형상화했습니다. 반면 김유정은 농촌의 해학과 애환을 그리되 그 이면의 가난과 무지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농민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했습니다. 이효석은 도시와 농촌, 자연과 문명의 대립을 섬세한 감수성과 묘사력으로 풀어냈고, 김동리는 한국 전통 신앙과 운명론을 통해 시대적 허무를 형상화했습니다. 채만식은 세태 풍자의 대가로서, 식민지 말기 부패한 현실과 인간의 위선을 신랄하게 고발했습니다.

 

계급의식과 혁명의 언어 — KAPF 문학

1925년 결성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은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문학 경향을 추동합니다. 이들은 문학을 계급 해방의 도구로 보았고, 현실을 고발하고 억압당한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했습니다. 이기영의 『고향』, 박영준의 『어머니』, 김남천의 『대하』 등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이기영은 농민의 피폐한 삶을 구체적이며 밀도 높게 묘사하면서 농촌 문제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하고자 했습니다. 이 계열의 소설은 소박한 인물과 서사를 통해 현실의 불평등을 드러내되, 종종 이념적 선전성에 기울면서 내면의 복합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작품은 시대의 모순을 폭로하고 억압받는 존재들의 생존과 저항을 진지하게 조명함으로써, 당대 문학이 감당한 윤리적 책무를 보여줍니다.

 

식민지 현실의 우회적 재현 — 모더니즘과 심리주의

1930년대에 들어와 일부 작가들은 직접적인 현실 고발이나 계몽적 메시지를 넘어서, 인간 심리의 내면과 언어의 실험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일종의 문학적 도피가 아니라, 억압된 현실을 보다 정교하게 반영하는 다른 방식의 저항이었습니다.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은 도시적 감수성과 의식의 흐름 기법을 활용하여, 개인의 내면과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의 불안정한 리듬을 교차시키며 새로운 문학적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이상『날개』, 『오감도』 등을 통해 자아의 분열, 언어의 해체, 삶의 허무를 다루며 당대 문단에서 독보적인 실험정신을 선보였습니다. 이들 작품은 형식적으로는 난해하지만, 외면된 자아의 위기와 식민지 인간의 고립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더니즘 소설은 일제의 문화 정책 아래서 위축된 언론 환경에서도 개인적 자유와 미학적 자율성을 실현하려는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었습니다.

 

검열과 자기 검열 — 문학의 생존 전략

일제는 문화 통치를 표방하면서도, 문학에 대한 검열을 강화했습니다. 특히 1930년대 중반 이후 전쟁 분위기가 고조되며, 친일적 작품이 권장되었고 비판적 내용은 억압되었습니다. 이때 많은 작가들은 작품 속 메시지를 우회적으로 표현하거나, 서사구조 자체에 균열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검열을 회피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작가는 현실의 무게에 타협하거나 노골적인 친일 문학으로 전향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문학이 단지 ‘진실을 쓰는 행위’에 그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기술’이기도 했음을 드러냅니다. 이광수와 같은 인물은 초기의 민족계몽문학에서 시작하여 점차 친일적 성향으로 변화했는데, 이는 작가 개인의 윤리 문제를 넘어 식민지 지식인이 겪은 존재론적 위기를 상징하는 사례로 읽히기도 합니다. 이 시기의 작품은 따라서 단순한 문학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그 배후의 정치적 맥락과 윤리적 결단까지를 고려해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성 작가와 주변화된 목소리

일제강점기의 소설사에서 여성 작가의 존재는 미미하게 다루어졌지만, 나혜석, 정칠성, 김명순 등의 작품은 이 시기 여성의 정체성과 억압 구조를 통찰하는 중요한 기록이기도 합니다. 특히 김명순의 『망각』, 『탄실이와 주영』 같은 작품은 여성의 연애, 결혼, 노동, 주체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남성 중심의 식민지 문학에 균열을 냈습니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품은 종종 개인적 감상이나 일탈로 폄하되었고, 문학사에서 주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들 작품은 식민지 여성이 겪은 이중의 억압, 즉 제국과 가부장제의 교차적 억압을 고찰할 수 있는 중요한 텍스트로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여성 작가들은 자기 경험에 근거한 목소리를 통해 당시 문학에 존재하지 않았던 삶의 진실을 제시했고, 이는 한국문학의 지형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줍니다.

 

 

결론: 억압의 서사, 저항의 서사, 인간의 서사

일제강점기의 소설은 시대의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역사 앞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문학의 고투였으며, 침묵을 강요받은 시대 속에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서사의 연속이었습니다. 단순히 민족적 저항의 기록을 넘어, 인간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했던 이 시기의 문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성찰을 제공합니다. 특히 ‘어떻게 말할 것인가’, ‘무엇을 써야 하는가’라는 문학적 윤리의식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일제강점기 소설은 깊은 통찰과 경고를 동시에 건네고 있습니다. 작가와 독자가 각자의 입장에서 겪는 현실은 다를지라도, 그 근본에 흐르는 질문은 같습니다. “당신이라면, 어떤 이야기를 썼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