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

갈 곳 없는 시대, 부서진 양심 — 이범선 『오발탄』이 던지는 전후 사회의 질문

happy-sweetpota 2025. 6. 29. 05:00

오발탄을 던질 수밖에 없는 전후 사회 모습과 관련된 사진

 

 

작품의 개요와 시대적 의미

한국전쟁이 남긴 가장 깊은 상흔은 총탄 자국이나 불타버린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버티는 사람들의 일상, 이념과 윤리 사이에서 조각난 인간 내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양심'이라는 단어의 무력화였습니다. 이범선의 『오발탄』은 그러한 전후 사회의 풍경을 가장 집요하고도 통렬하게 포착한 작품입니다. 이 소설은 단지 전쟁의 비극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이 남긴 균열 속에서 어떻게 인간이 삶을 지속하고, 혹은 무너지는지를 탐색합니다.

 

 

주인공 송철호의 삶과 가족의 붕괴

주인공 송철호는 북에서 월남한 실향민입니다. 직업은 계리사 사무실의 하급 서기. 양심적으로 살아가려는 그는 늘 치통에 시달리고, 점심은 보리차로 때우며, 낡은 양말을 신고 하루하루를 버팁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그 스스로의 고통만으로 가득 찬 것이 아닙니다. 집 안에는 전쟁이 남긴 상처들이 말없이 들끓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실성하여 고향을 찾아가자며 헛소리를 반복하고, 여동생은 미군을 상대로 몸을 파는 양공주가 되었으며, 아내는 출산을 앞두고 병약하며, 동생 영호는 상이군인의 신분으로 방탕한 생활을 일삼습니다. 이처럼 집안 전체가 한국전쟁의 그림자 속에 놓여 있습니다. 이 가족은 하나의 공동체라기보다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지는 파편에 가깝습니다.

 

 

윤리와 생존 사이에서의 갈등

동생 영호는 전쟁 중 부상을 당한 뒤로 인간적인 윤리나 공동체적 책임에 무관심한 채, 냉소적이고 자포자기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그는 송철호의 삶을 향해 비아냥댑니다. 윤리나 양심 같은 것은 환상이며, 실제로 중요한 건 생존이라고 말합니다. 영호는 "양심은 손끝의 가시"라고 말하는데, 이는 양심이 인간을 불편하게 만들 뿐 실질적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그의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에 따르면, 윤리나 도덕은 일종의 허위의식이며, 그것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철호는 어리석고 무기력한 인간입니다. 이러한 영호의 발언은 단순한 패륜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생존 윤리에 충실한 자의 자기방어일 수 있습니다.

 

 

양심적 인간의 무력감

그러나 철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려 애씁니다. 그가 선택하는 도덕은 시대와 충돌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윤리적일 수 없다는, 빈곤과 불의 사이의 아이러니를 작가는 냉철하게 드러냅니다. 결국, 이 소설은 양심적인 사람이 시대 속에서 얼마나 무기력해지는가를 보여주는 반어적인 드라마입니다.

 

 

비극적 결말과 주제의 압축

소설의 클라이맥스는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철호가 회사에서 일을 하던 중, 영호가 강도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연락을 받습니다. 충격 속에 경찰서를 다녀온 철호는, 병원에서 아내가 난산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하루 만에 가정은 완전히 무너지고,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치과에 들러 치통의 근원이던 썩은 이를 뽑고는 택시를 탑니다. 하지만 갈 곳이 없습니다. 병원, 경찰서, 집을 향해 동시에 가자고 말하는 철호의 모습은 방향감각을 잃은 시대적 주체, 무너진 윤리적 주체의 아이러니한 형상입니다. 이에 택시기사는 말없이 중얼댑니다. "어쩌다 오발탄 같은 손님이 걸렸어. 자기 갈 곳도 모르게."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과 통찰

이 마지막 문장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압축합니다. 오발탄, 즉 잘못 발사된 탄환은 명중하지 못하고 허공을 가릅니다. 철호는 양심이라는 탄환을 장전하고 살아왔지만, 그것은 이미 누군가의 심장을 뚫을 수도, 목표에 도달할 수도 없는 상태였습니다. 시대는 그에게 방아쇠를 당길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사되지 못한 채 표류하는, 혹은 발사되었지만 명중하지 못한 인간입니다.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오발탄』이 중요한 이유는, 전후 한국사회의 진짜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는 데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이 남긴 폐허는 총탄의 흔적보다 훨씬 더 깊고 넓습니다. 이 소설은 그 폐허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윤리'와 '생존' 사이에서 방황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떤 인물은 적응하며 자신을 잃고, 어떤 인물은 지키려다 무너집니다. 결국, 이 시대의 누구도 온전히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범선은 『오발탄』을 통해 한국전쟁이 단지 북과 남의 대립이나 이념의 충돌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내면과 일상의 질서를 무너뜨린 거대한 상처였음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곧잘 개인 윤리의 위기, 가족 공동체의 해체, 그리고 삶의 방향을 잃은 존재들의 길잃음을 낳습니다. 작품 속 송철호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희망이 되지 못하고,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의 양심은 고귀하지만, 시대는 그것을 불가능한 짐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강력한 울림을 갖습니다. 양극화와 사회적 단절, 윤리의 혼란 속에서 우리는 또 다른 오발탄을 쏘고 있지는 않을까요?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른 채. 『오발탄』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방아쇠를 당기는 손끝에 정말 장전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 탄환은 누구를 향해 가야 하는지. 바로 지금 이 시대에도 말입니다.

 

 

제목 오발탄과 주제의 관련성

이범선의 『오발탄』은 문학적 장치로서의 상징을 섬세하게 사용하여 주제를 강화하고, 독자로 하여금 인물의 심리와 시대 상황을 더욱 깊이 이해하도록 돕습니다. 특히 "오발탄"이라는 제목 자체가 작품의 전체적인 상징 구조를 압축해 보여주는 대표적 키워드입니다.

우선, ‘오발탄’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우연의 사고가 아니라, 정확한 목표 없이 방황하고 비틀거리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이는 주인공 송철호의 삶을 관통하는 은유입니다. 그는 양심적으로 살고자 애쓰지만 시대는 그의 고결함을 무력화시킵니다. 철호는 자신의 윤리와 책임을 지키려는 사람이며, 그런 태도는 이 전후 혼란의 시대에서 아무런 의미 없는 발사처럼 공중에 흩어질 뿐입니다. 즉,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오발탄’인 것입니다.

또한 작품 곳곳에는 ‘치통’이라는 신체적 고통이 등장합니다. 치통은 단순한 통증을 넘어, 철호가 안고 있는 시대적 윤리의식의 짐, 인간적 책임감의 무게, 해결되지 못한 내면적 갈등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합니다. 송철호는 썩은 이를 품고 살아가며 늘 아파하고, 말조차 제대로 하기 어려워합니다. 이때의 치통은 시대적 병폐와 개인의 도덕성 간의 충돌이 낳는 신체화된 고통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소설 말미에서 이 썩은 이를 뽑아내지만, 그것은 오히려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절망과 자기 포기의 순간으로 연결됩니다. 양심을 제거해도 현실은 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택시'와 '방향 없는 이동' 또한 중요한 상징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송철호는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명확히 말하지 못한 채 병원으로, 경찰서로, 집으로 가자고 정신없는 말을 내뱉습니다. 이 장면은 그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른 채 허공을 떠도는 한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가 요청하는 방향들은 곧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도 가장 붕괴된 공간들입니다. 병원은 생명이 떠나간 장소이고, 경찰서는 동생의 몰락을 확인한 공간이며, 집은 이미 희망을 잃은 폐허와도 같습니다. 이때의 택시는 현대 도시 문명 속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심리적 방황을 상징하며, 운전기사의 말 한마디—“오발탄 같은 손님”—는 그 방황의 본질을 정확히 지적하는 냉소적인 선언입니다.

가족 구성원 하나하나도 상징적으로 기능합니다. 어머니는 실성한 채 “가자, 가자”를 외치며 이북 고향으로의 귀향을 망상합니다. 그녀는 한국 전쟁 이후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되돌릴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인의 내면을 대변합니다. 동생 명숙은 양공주로 전락한 여성으로, 전후 사회의 도덕적 해체와 여성성의 상품화를 상징합니다. 동생 영호는 상이군인임에도 도덕을 비웃고, 생존만을 추구하는 인간상으로 시대가 요구하는 냉혹한 생존 논리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이 가족은 더 이상 공동체로 기능하지 못하며, 그 해체의 중심에는 시대의 비극이 있습니다.

이처럼 『오발탄』은 전쟁 이후 현실의 부조리와 인간 존재의 균열을 다층적인 상징 구조로 서사화합니다.

 

 

오발탄의 주요 주제의식

이 작품의 주요 주제의식은 다음과 같은 흐름으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첫째, 양심의 무력화와 윤리의 붕괴입니다. 송철호는 도덕을 지키려 하지만, 그것은 아무런 현실적 보상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철호는 윤리를 고수함으로써 더 큰 고통과 고립을 감내해야 합니다. 전쟁과 가난, 시대의 폭력은 개인의 내면적 윤리마저도 부정하게 만들고, 살아남기 위해서 도덕을 버리는 일이 ‘현명한 선택’처럼 여겨지는 현실이 조명됩니다.

둘째, 가족 공동체의 해체와 인간 소외입니다. 전후의 한국 사회는 전통적 가족 질서를 파괴했습니다. 『오발탄』에서의 가족은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한 기대나 존경 없이, 생존을 위해 각자도생하는 단위로 전락합니다. 형제는 서로를 향해 냉소를 던지고, 부모는 자녀를 더 이상 붙잡을 힘이 없으며, 여성은 더 이상 보호받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처럼 이 작품은 한국전쟁 이후의 가족이라는 사회 최소 단위가 해체되는 과정을 날카롭게 포착합니다.

셋째, 도시 빈민의 비극과 사회 구조적 한계입니다. 이 소설에서 송철호는 전쟁으로 인해 도시로 밀려온 실향민이자 하류 서민의 삶을 살아가는 인물입니다. 그의 삶은 부서진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서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미로에 갇혀 있습니다. 직장, 병원, 집, 경찰서—이 모든 공간은 구조적으로 그를 돕지 않으며, 오히려 더 큰 절망을 각인시킵니다. 따라서 『오발탄』은 도시 빈민의 삶을 단지 현실 묘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어떻게 체제의 산물인가를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넷째, 실존적 불안과 주체의 해체입니다. 철호는 끊임없이 무너지는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윤리를 지키려 애쓰지만, 그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그가 치통을 참다 이를 뽑는 순간, 이는 상징적으로 윤리와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이며,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상태는 자아의 중심이 무너진 현대인의 단면입니다. 그는 책임도, 선택도 할 수 없는 주체, 다시 말해 해체된 실존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한국 전후문학의 실존주의적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고통과 고립 속에서도 윤리적 결단을 할 수 있는가, 혹은 그런 결단이 시대 안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철저한 질문이 담겨 있습니다. 철호의 윤리는 결과적으로 실패합니다. 그러나 그 실패는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질문 자체를 잊은 시대 속에서 유일하게 도덕적 중심을 지키려 했던 노력의 증거로 남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발탄』의 상징들과 주제의식은 단순히 한 인물의 몰락이나 한 가족의 붕괴를 넘어, 한국 사회 전체의 양심, 도덕, 공동체가 어떻게 허물어졌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구조물입니다. 이범선은 이 작품을 통해 한국 전쟁 이후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절박한 물음을 던졌고, 그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