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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그림자 속, 삶과 예술의 진실을 묻다– 박완서 『나목』을 읽고

happy-sweetpota 2025. 7. 17. 00:11

전쟁이 한 사람의 삶에 남긴 흔적은 단지 시간의 기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은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을 배경으로, 전쟁과 죽음, 예술과 일상, 사랑과 상실이 교차하는 삶의 복잡한 풍경을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입니다. 작가 자신의 체험에서 출발한 이 소설은, 허구적 이야기 너머에 진실된 감정과 시대의 아픔이 녹아 있어 한국 현대소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이 글에서는 『나목』이 가진 다층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다섯 가지 핵심 주제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박완서 나목을 읽고

 

1. 전쟁의 상처, 일상을 침식하다

『나목』의 배경은 6.25 전쟁 직후 서울이 수복된 직후입니다. 주인공 이경은 두 오빠를 잃고, 그 죄책감 속에서 어머니와 함께 암울한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경의 어머니는 아들들을 잃은 충격에 정신을 놓고 살며, 이경은 그 곁에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안고 버텨냅니다. 이처럼 소설은 전쟁이 개인에게 남긴 정신적 상처를 섬세하게 그려내며, 총탄이 멈춘 뒤에도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침식해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경이 예술가의 길보다는 PX의 실용적인 화가로 살아가는 것도, 바로 이 전쟁이 낳은 생존의 절박함 때문입니다. 실력보다는 속도와 효율이 중요시되는 PX 초상화 가게의 세계는, 아름다움이나 감정보다 살아남는 일이 먼저인 전쟁 후의 현실을 상징합니다.

 

2. 고목과 나목, 삶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

소설의 중심 모티프 중 하나는 ‘고목’과 ‘나목’입니다. 이경은 오랫동안 옥희도가 그린 그림이 고목(枯木)이라 생각했습니다. 말라 죽은 나무, 생명이 끝난 나무. 그러나 유작전을 통해 그것이 나목(裸木), 즉 벌거벗은 나무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고목은 죽음의 상징이라면, 나목은 생명을 준비하는 고요한 상태, 혹은 본질 그대로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경이 바라본 세계는 고통으로 말라죽은 고목처럼 느껴졌지만, 옥희도는 그 속에서도 살아 있으려는 힘, 껍질을 벗은 나목의 진실을 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독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우리가 겪는 아픔과 고통도 어쩌면 더 큰 생명을 준비하는 과도기일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어떤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가’라는 점입니다.

 

3. 예술과 삶의 간극, 그리고 화해

옥희도는 진짜 화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PX에서 흘러가는 대중적 그림을 그려야 했고, 진지한 예술과 현실의 생계를 오가며 괴로워합니다. 반면 이경은 처음부터 예술보다는 현실을 택해 PX에 순응합니다.

이 두 인물의 차이는 ‘예술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옥희도는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 그림이 결국 ‘나목’으로 남았고, 죽은 후에야 진정한 평가를 받습니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을 때 외롭고 가난하게 살았으며, 삶의 편안함은 얻지 못했습니다.

이경은 이후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지만, 옥희도의 유작전을 통해 예술이 갖는 ‘진실성’을 새삼 깨닫습니다. 예술과 삶, 이 둘은 상충하는 개념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가꾸는 또 다른 얼굴이라는 점을 이 소설은 말하고자 합니다.

 

4. 사랑과 상실, 관계의 깊이에 대해

이경과 옥희도의 관계는 전형적인 로맨스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명동을 함께 걷고, 성당과 장난감 가게를 드나들지만, 고백도 이별도 없이 흩어집니다. 이경은 옥희도의 가난한 집에서 그의 그림을 보고, 그의 고독을 느끼고 돌아옵니다.

그 후 이경은 PX에서 만난 황태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살아갑니다. 일상은 안정되었지만, 가슴 어딘가에는 옥희도라는 인물이 남아 있습니다. 유작전을 보러 간 자리에서, 이경은 과거의 감정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자신의 삶의 어떤 본질적인 경험이었다는 것을 자각합니다.

이 장면은 ‘사랑의 완성’이 결혼이나 소유가 아니라, 삶의 어떤 각인을 남기는 깊이 있는 경험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경이 태수에게 갑작스럽게 키스를 퍼붓는 장면은 바로 그 각성을 일상으로 끌어들이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5. 여성의 시선으로 본 전쟁과 삶

『나목』은 여성 작가 박완서의 첫 장편소설이자, 전쟁을 바라보는 여성적 시선을 담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남성 중심 서사에서 전쟁은 보통 영웅적이거나 비극적 전투로 그려집니다. 그러나 『나목』에서는 죽은 자들을 기억하고,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세심하게 따라갑니다.

이경의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현실을 거부한 채 살아가고, 이경은 그 곁에서 고통을 견디며 버티다 PX에서 일하게 됩니다. 현실 속 여성은 누군가의 전사(戰士)가 아니라, 잃은 자이자 남은 자입니다. 그들은 가족을 돌보고, 생계를 꾸리며, 슬픔을 끌어안고도 묵묵히 살아갑니다.

이러한 묘사는 한국 전쟁 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감정의 과잉 없이, 정제된 문체와 절제된 묘사로 박완서는 전쟁을 겪은 한 여성의 시선을 조용히, 그러나 깊게 전합니다.

 

마무리하며

박완서의 『나목』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전쟁 그 자체보다 전쟁이 남긴 삶의 풍경과 감정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눈앞에서 죽음을 겪고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도 진실된 예술과 사랑을 꿈꾸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여전히 삶과 현실 사이에서, 진심과 타협 사이에서 고민합니다. 『나목』은 그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는 고목입니까, 나목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