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철의 『탈향』 ― 고향을 떠나는 것, 현실을 선택하는 용기
‘고향’은 그리움의 대상일까요, 아니면 이별의 대상일까요?
이호철의 단편소설 『탈향』은 전후 한국 사회의 상처와 실향민의 내면 풍경을 그리며, “떠나야 할 고향”이라는 역설적인 명제를 제시합니다. 6·25 전쟁 이후 피란지 부산에서 살아가는 네 청년의 이야기를 통해, 이 작품은 단순한 전쟁 체험담이나 민족적 고뇌의 차원을 넘어, 개인이 자기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선택해야 하는지를 성찰하게 합니다.
줄거리 요약 ―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
이 소설의 주된 사건은 6·25전쟁 중 1·4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온 네 실향민 청년의 일상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엉겁결에 LST(전차 양륙함)를 타고 월남한 ‘나’, 두찬, 광석, 하원은 부산 부두 근처에서 함께 피난살이를 시작합니다. 숙소조차 없는 이들은 정차된 화차(火車) 칸에 숨어 지내며, 부두에서 하역 노동을 하며 근근이 연명합니다.
그들은 고향에서 내리던 눈, 가족, 웃음 많던 이웃을 기억하며 감상에 잠깁니다. 하지만 그들의 현실은 가혹하고 차갑기만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광석은 화차에서 실족사하고, 두찬은 죄책감에 휩싸여 ‘나’와 하원을 떠나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나’는 하원을 버릴 결심을 합니다. 그 결심은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라, 감상주의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는 선언이 됩니다.
‘탈향’이라는 제목의 의미 ― 실향을 넘어선 결단
1. 이상화된 고향 이미지와의 결별
등장인물들은 화찻간에서 고향을 떠올리며 눈, 어머니, 형수, 따뜻한 웃음 같은 아름다운 기억을 되새깁니다. 고향은 이들에게 정서적 안식처이며, 전쟁과 타향살이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정서적 도피처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향은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되돌아갈 수 없는 상실의 공간입니다. 따라서 ‘탈향’은 단지 고향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성이 상실된 이상과 감상의 세계로부터 벗어나는 심리적 결단을 의미합니다.
2. 감상주의와 의존성에서의 벗어남
하원은 고향을 이야기하며 자주 울고, 고향에 대한 막연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나’는 점차 하원의 감상적 태도에 대해 피로감과 거부감을 느끼고, 결국 그와 결별할 결심을 합니다.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은 심리적 전환을 상징합니다.
- 감상주의 → 현실인식
- 수동적 의식 → 능동적 삶의 의지
- 의존적 정체성 → 독립적 정체성
즉, ‘탈향’은 인간 내면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감정에 기대려는 미성숙한 태도와 결별하고, 자기 삶의 주체로 거듭나는 성장의 계기입니다.
3. 전통적 공동체 의식에서 개인적 자아로의 이행
이 작품의 인물들은 모두 고향이라는 정서적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이 공동체가 더 이상 기능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광석의 죽음, 두찬의 탈출, 하원의 무력함은 고향과 혈연·지연 중심의 공동체가 현실의 위기 앞에서 무력하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나’의 탈향은 이 전통적 유대에서 벗어나, 근대적 자아의 탄생, 즉 현실을 인식하고 책임지는 개인으로서의 자기 분리를 뜻합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가 겪던 공동체 해체와 개인화의 과정을 반영합니다.
4. 불안과 죄책감을 동반한 결단
‘나’는 하원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이기심이 아니라, 윤리적 갈등과 심리적 불안을 수반하는 내면의 진통을 드러냅니다. 즉, ‘탈향’은 무정한 이별이 아니라, 인간적 연민을 안고 떠나는 고통스러운 선택입니다.
이 눈물은 다음과 같은 양면적 심리를 반영합니다.
- 공동체적 윤리의 잔존
- 그러나 감상주의를 안고는 현실을 돌파할 수 없다는 인식
따라서 ‘탈향’은 내면에서의 양가감정(ambivalence) — 감정적 유대와 현실 인식 사이의 갈등을 통과한 후 비로소 이루어지는 심리적 성장입니다.
등장인물 분석 ― 네 인물, 네 방식의 현실 인식
이 소설은 네 인물을 통해 전후의 삶에 대한 서로 다른 태도와 반응을 보여줍니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 고향 출신이지만, 고통을 감내하는 방식은 매우 다릅니다.
‘나’ ― 현실을 선택한 냉철한 자
열아홉의 청년인 ‘나’는 처음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공유하지만, 점차 현실에 적응하고자 결심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하원을 떠나는 결단을 통해 감상주의를 탈피합니다. '나'는 작가의 자전적 체험을 반영한 인물로, 현실과 자기 인식에 눈떠가는 근대적 자아의 각성을 상징합니다.
두찬 ― 말없는 집착과 고뇌의 그림자
스물넷의 두찬은 과거에 머무른 채 현실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말이 적고 융통성이 없으며, 고향을 되뇌거나 새 삶을 추구하지도 못합니다. 광석의 죽음 이후 그는 양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자취를 감춥니다. 두찬은 전통적 공동체 윤리를 내면화했으나, 새로운 현실 속에서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인물입니다.
광석 ― 적응을 시도했으나 비극을 맞은 현실주의자
두찬과 동갑인 광석은 타향에 적응하려는 의지가 강한 인물입니다. 사리판단이 빠르고 사교적이며, 생존을 위해 현실을 받아들이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가장 먼저 희생되고 맙니다. 이는 불안정한 시대에 아무리 적극적으로 적응하려 해도 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무력하다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하원 ― 순수하지만 비현실적인 소년
열여덟의 하원은 감상주의의 화신입니다. 고향 이야기만 하면 울먹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과거에만 머무르려 합니다. 그는 독자에게 연민을 자아내지만, 점차 ‘나’에게조차 짐스러운 존재로 느껴지게 됩니다. ‘나’가 하원을 떠나는 장면은 감정에 매몰된 존재로부터 벗어나려는 각성의 상징입니다.
화찻간의 상징성 ― 불안정한 삶의 거처
인물들이 기거하는 ‘화찻간’은 매우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화차는 정차해 있더라도 언제든 출발할 수 있고, 그때마다 목숨을 걸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이는 실향민의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삶을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화찻간은 또한 사회적 주변부에 내몰린 자들의 임시 거처이자, 현실의 차가운 구조 속에서의 생존 공간입니다. 부두 노동자, 떠도는 삶, 일시적 거주 공간 등은 산업화 초기 한국 사회의 빈곤한 현실과 함께, 이들 네 사람의 심리적·사회적 유랑을 보여 줍니다.
문학사적 의의 ― 전후 소설에서 성장 소설로의 전환
『탈향』은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거나 민족 통일을 주창하는 기존의 전후문학과는 다릅니다. 이 작품은 분단이나 전쟁보다는 그 이후의 인간 내면에 주목합니다. 특히 ‘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현실 인식의 변화와 내면의 성장 과정을 다루며, 성장 소설의 성격을 띱니다.
이호철은 이 작품을 통해 전후 사실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삶의 비극적 조건 아래에서도 인간은 도피하거나 절망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을 냉정히 직시하고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탈향』은 단순히 실향민 문학을 넘어서, 근대적 자아 탄생의 기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의 시사점 ― 탈향은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다
『탈향』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특수한 배경 속에서 태어난 작품이지만, 그 메시지는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 정체성의 혼란: 고향을 떠났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혼란은, 글로벌 시대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주제입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또는 심리적으로 자신의 '고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 감상주의의 경계: 하원의 순수성은 아름답지만, 현실 속에서 그것은 때때로 무책임하게 작용합니다. 『탈향』은 감상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과 마주하라는 메시지를 던집니다.
- 공동체의 해체와 개인화: 같은 고향이라는 연대감도,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는 쉽게 무너집니다. 이 작품은 공동체적 삶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된 개인으로 살아가야 할 시대적 과제를 제기합니다.
- 청년 세대의 성장 통증: 전쟁은 끝났지만, 지금의 청년들 역시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 자신만의 현실을 선택해야 합니다. 『탈향』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 속에서도 삶의 방향을 모색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맺으며 ― 현실은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선택의 대상이다
『탈향』은 말합니다.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해서 과거에 머물 수는 없다고.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답지만, 그것만으론 삶을 지탱할 수 없다고. 하원의 눈물을 뒤로한 채, ‘나’는 길을 떠납니다. 그것은 가혹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내겠다는 결심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각자의 방식으로 고향을 떠나고 있습니다. ‘탈향’의 의미는 단지 육체적인 이동이 아니라, 이념, 감상, 과거로부터 벗어나 자기 삶을 책임지는 ‘내면의 독립’입니다. 이호철의 『탈향』은 그 용기 있는 첫걸음을, 문학이라는 언어로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