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

윤흥길-장마, 장마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 한 소년이 겪은 가족과 이념의 상처

happy-sweetpota 2025. 6. 28. 02:20

작품 개요

작품 속 배경은 1950년 여름, 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의 남한 농촌입니다. 휴전선 부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마을 곳곳에서 피란민들이 몰려들며, 군인들이 마을을 드나드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하지만 작가는 전쟁터보다는 ‘후방’인 가족 내부를 조명함으로써 전쟁이 단지 총칼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치열하게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소설이 쓰인 1970년대 초반은 유신 체제가 강화되며 이념 문제가 여전히 민감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장마』는 검열을 피해가면서도 민족 분단이 남긴 인간적 상처를 문학적으로 성찰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전쟁 후 가족들을 기다리는 엄마와 아이. 윤흥길의 장마 속 아들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모습과 닮아 있음.

 

 

시대적 배경

윤흥길의 『장마』는 1950년 한국전쟁이 막 발발한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으며, 그 배경이 되는 공간은 남한의 한 농촌 마을입니다. 이 시기는 한국 사회 전반이 정치, 군사, 그리고 이념 면에서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던 시기입니다. 단순히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까지 이념 갈등이 깊숙이 파고들었던 때였습니다.

1950년 6월,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자 남한은 급속히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났고, 이후 인천상륙작전으로 반격하여 다시 북진하게 됩니다. 이처럼 짧은 시간 내에 전세가 급변하면서 전국은 점령과 탈환을 반복하는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졌습니다. 전선이 아닌 후방 지역, 즉 농촌마을에서도 인민군이 들어왔다가 다시 국군이 진입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민간인들은 크고 작은 희생을 겪어야 했고, 그 와중에 보복과 숙청, 정치적 낙인찍기 등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한 마을, 더 나아가 한 가족 안에서도 '국군과 인민군', '남과 북', '좌익과 우익'의 갈등이 현실로 벌어졌습니다. 실제로 한 형제는 국군에, 다른 형제는 인민군에 가담하는 사례가 있었고, 가족 간의 감시와 고발, 불신과 의심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습니다. 『장마』에 등장하는 인물 구성 역시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합니다. 반공주의자인 할머니와 인민군에 가담한 아들을 기다리는 외할머니 사이의 갈등은 이념이 가족 간의 사랑마저도 갈라놓을 수 있었던 시대의 잔혹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작품의 화자인 어린 소년은 이처럼 복잡하고 위태로운 시대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나이지만,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말다툼과 정서적 긴장, 충돌을 통해 이 시대가 얼마나 무섭고 혼란스러운지를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아이의 눈을 통해 그려지는 시대의 상흔은 독자로 하여금 전쟁이 군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아이와 노인, 가족 모두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음을 실감하게 만듭니다. 이처럼 『장마』는 당시의 역사적 비극을 가장 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그리고 한 소년의 시선으로 섬세하게 포착해낸 작품입니다.

 

 

줄거리 요약

이야기는 ‘나’라는 어린 소년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소년은 외할머니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가끔 집에 들르는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외삼촌은 인민군으로 참전 중이고, 외할머니는 그런 외삼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반면 할머니는 강한 반공주의자이며, 외삼촌을 ‘빨갱이’라며 적대시합니다. 두 노인은 같은 집에서 생활하지만, 극단적으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고수하며 끊임없이 갈등을 빚습니다.

 

소년은 그런 가족의 분위기 속에서 혼란을 느끼며 성장합니다. 그는 외삼촌이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면서도,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 무섭고 괴롭습니다. 그러던 중 외삼촌이 군경에게 체포되어 돌아오고, 그로 인해 외할머니는 충격을 받고 병이 깊어져 결국 죽음에 이릅니다. 장례를 치르는 날, 큰비가 내려 마을이 침수되고, 집안의 구렁이가 나타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구렁이는 죽은 외할머니의 혼령이자, 이 집안을 둘러싼 분열과 갈등의 상징으로 해석됩니다. 결국 가족은 이혼과 죽음, 이념 갈등 속에서 해체되어 가고, 소년은 그런 현실을 바라보며 성장의 한 단계를 넘어섭니다.

 

 

주요 인물 분석

  • ‘나’: 이야기의 화자이며 어린 소년입니다. 그의 시선을 통해 가족 내의 갈등과 전쟁의 잔혹함이 여과 없이 전달됩니다. 아직 세상의 복잡함을 다 알지 못하는 나이는 하지만, 그 속에서 혼란과 고통을 체험하며 내면적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 외할머니: 외삼촌을 기다리는 인물로, 가족애가 깊고 따뜻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인민군이 된 아들을 향한 사랑이 결국 그녀를 고립시키고 병들게 만듭니다. 외할머니는 작품에서 전쟁의 피해자이자,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는 중심적 인물입니다.
  • 할머니: 외할머니와 대립하는 인물로,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입니다. 외삼촌을 향한 적개심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선 증오에 가깝습니다. 그녀의 성격은 폐쇄적이고 강압적이며, 소년에게 공포심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 어머니: 중립적인 입장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양쪽 어머니 사이에서 갈등을 중재하려 하지만, 뚜렷한 목소리를 내지는 못합니다. 전쟁이 만든 애매한 입장과 무력감을 상징하는 인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 외삼촌: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은 짧지만,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적 인물입니다. 그가 인민군에 참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족은 갈등하고 해체되며, 그의 귀환은 외할머니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시점과 서술 방식의 특징

 

『장마』는 어린 소년인 ‘나’의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됩니다. 이 서술 방식은 독자로 하여금 전쟁과 이념 갈등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보다 순수하고 직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어린 화자의 눈은 세상의 복잡한 사정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상황이 전달됩니다. 이 시점은 또한 가족 내 어른들의 말과 행동에 대한 소년의 해석을 통해 독자가 객관적으로 판단하게끔 유도합니다. 예를 들어, 외할머니와 할머니의 갈등이나 어른들의 이념적 말다툼은 종종 소년의 눈에는 ‘무섭고 이상한’ 일로 보입니다. 이는 전쟁이라는 거대한 비극이 결국 무고한 이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과 고통을 안기는지를 강조하는 데 효과적입니다.

 

구렁이의 상징성과 주제 의식

1) 죽은 외할머니의 혼령

등장인물들은 구렁이를 외할머니의 혼이 깃든 존재로 여깁니다. 외할머니는 끝까지 인민군에 간 외삼촌을 기다리며, 아들과의 재회 직후 체포 장면을 본 충격으로 숨을 거둡니다. 그녀의 죽음은 전쟁과 이념 갈등이 만든 비극입니다. 구렁이가 그녀가 숨진 날 밤, 폭우 속에서 등장한 것은 마치 풀리지 못한 한(恨)이 남아서 돌아온 듯한 인상을 줍니다.

 

2) 가족과 공동체의 갈등과 죄의식의 형상

구렁이는 외할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죄의식과 갈등의 화신이기도 합니다. 외삼촌을 향한 외할머니의 사랑과 믿음은, 반공주의자인 친할머니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두 노인의 갈등은 단순한 가족 다툼이 아니라 이념 대립의 축소판이며, 외할머니의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습니다.

구렁이는 죽은 자가 남긴 감정의 잔해이며, 그 집안에 쌓인 응어리가 시각화된 존재입니다. 따라서 구렁이의 등장은 단지 무서운 일이 아니라, 해결되지 못한 역사와 상처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상징합니다.

 

3) 전쟁의 유령, 분단의 그림자

구렁이는 또한 전쟁 그 자체의 유령 같은 존재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로 인해 갈라진 가족, 무너진 믿음, 씻기지 않는 상처는 여전히 일상의 곳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구렁이는 바로 그런 분단의 잔재, 전쟁의 그림자를 형상화한 존재입니다.

 

4) 자연과 인간 세계의 불화

구렁이는 장마라는 자연현상과 함께 등장하며, 자연이 인간에게 가져오는 공포와 재난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장마는 집을 잠기게 하고, 구렁이는 가족의 삶을 뒤흔듭니다. 이는 인간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자연과 역사, 그리고 이념이라는 거대한 흐름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보여줍니다.

 

5) 결론

『장마』의 구렁이는 단순한 공포의 상징이 아니라, 분단과 전쟁의 후유증, 가족 간 갈등, 죽은 자에 대한 한과 죄의식, 인간 내면의 억압된 감정까지 집약된 존재입니다. 이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통틀어 인간의 심리를 자연물이나 동물, 혹은 환상적 존재로 구체화하여 드러내는 전통적인 상징기법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즉, 구렁이는 『장마』라는 작품이 전쟁과 이념의 비극을 단순한 정치적 고발이 아니라, 심리적·철학적 깊이를 갖춘 인간 드라마로 승화시킨 핵심 장치임을 보여주는 존재라 할 수 있습니다.

 

 

문학사적 의의와 오늘날의 시사점

『장마』는 한국 문학사에서 분단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이념적 대립이 단순히 정치나 군사적인 영역에서 그치지 않고, 가장 사적인 공간인 ‘가족’ 안에서조차 얼마나 큰 상흔을 남기는지를 정밀하게 묘사합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의 해체는 곧 민족 공동체의 분열을 상징하며, 전쟁의 본질적 비극이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또한 이 작품은 어린이의 시점을 빌려 전쟁을 바라보게 함으로써, 그 고통과 혼란을 보다 인간적이고 정서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장마』는 특정 이념이나 정파의 입장을 지지하거나 비판하는 것을 넘어서, 분열된 현실 속에서 인간이 겪는 보편적 고통과 치유되지 못한 상처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분단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정치적·사회적 갈등은 여전히 우리 주변에 존재합니다. 『장마』는 그런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거의 상처를 어떻게 마주하고,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그려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 안의 갈등은 과연 해소되었는가? 이 작품은 단순한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